진리와 진실은 영어로는 모두 ‘truth’이지만 우리말 어감으로 둘은 전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서양 학문이 대세인 시대여서 서양의 관행을 따르는지라 나 자신도 수업시간에 부지불식간에 ‘과학적 진리’, ‘문학적 진리’처럼 혼용해서 사용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말 어법에 따르면 과학자로서 나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연애할 때는 진실해야 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그러나 삶과 문학에서는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말처럼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 주는 것이 개념의 혼란을 줄인다는 면에서 훨씬나은 법이다. 늘 서양 귀신들에 주눅 들어 살아왔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선조들도 만만하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목적은 진리를 향해 질주하려 하지만, 인문학은 진실을 향해 뚜벅이 걸음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진리와 진실의 사용이 헷갈리듯이 인문학과 과학도 목적과 기능과 효과가 서로 헷갈려 사용되는 감이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최근 인문학 열풍에 관한 글을 다시 훑어보았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횡행하고 있고 사정은 지금도 별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자리에서 나는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스티브 잡스 이후 인문학은 21세기 창조경제의 수익창출의 원리가 되었다. 알다시피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2011년 ‘아이패드•2’를 소개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즉, 애플의 유전자 속에 있는 것은 교양과 결합한 기술,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며, 이것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결과들을 낳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대마다 세속적 성공을 확보할 수 있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이 있는데, 필립 리입(Philip Rieff)은 이를 ‘인성유형’(personality type)이라 명명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인성유형은 반항하는 예술가이고, 이를 선취한 집단은 기업가이다. 우리 시대 성공한 기업가들은 과거 중화학공업 시대의 근면하고 중후한 애국자의 이미지를 벗고, 종종 교양과 인문학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그들은 발랄하고, 창의적이고, 당대의 대세에 저항하는 오만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잡스의 발언이 있고나서, 갑자기 인문학에 대한 세계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마, 10년 전이라면 분명 ‘인문학의 위기’라는 발언이 대세였을 터인데, 갑자기 인문학이 잡스로부터 기적의 보약이라도 한 첩 받아먹은 양 시대적 대세로 부상했다.

요즘 개념적 구체성이 부족하다고 타박 받는 ‘창조경제론’에 대해 “창조경제의 핵은 '인문학'이 되었다. “세계 유수의 선진기업들 CEO를 봐라. 대부분이 인문학 출신들이다. 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 창조적 파괴가 기업을 이끌고 있다”라고 말들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인문학의 부상은 반드시 경제적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조직의 수장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며 집단적 사유에 침윤된 권력자들도 역설적으로 조직 운영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변한다. 그런데 인문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결코 모순적 현상이 아니다. 지난 백 년간 뛰어난 인문학자들조차 인문학 또는 교양은 혼란의 두려움에 맞선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사유했다. 우리말 ‘교양’의 출처가 라틴어 ‘artes liberales’이든, 독일어 ‘Bildung’이든, 아니면 영어의 ‘culture’이든지간에, 내가 전공한 영문학 전통에서는 19세기 후반 매쓔 아놀드(Matthew Arnold)부터 T. S. 엘리어뜨(Eliot), F. R. 리비스(Leavis)를 거쳐 20세기 후반부 앨런 블룸(Allan Bloom)이나 해럴드 블룸(Herald Bloom)에 이르기까지 주류 비평가들은 대중은 고급문화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속물이자 정치적 혼란의 주역들이며, 오로지 인문적 훈련을 통해서만 혼란을 순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적 비평가들의 계보를 구성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는 아놀드의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 속에서 두 사람의 아놀드를 발견한다. 삶을 부와 생산으로 환원하거나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가들을 비판하면서 대중교육 확대를 주장하는 ‘문화적’ 아놀드와 1866년 하이드 파크 봉기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대중을 탄압하려는 ‘보수적’ 아놀드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하이드 파크 봉기를 경험한 것을 계기로 하여, 고전 그리스 시대의 가치, 특히 ‘사심 없는 객관성’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해온 최상의 것들” 속에서 “인간의 완벽함”을 찾으려는 교양의 이념을 제시하는데, 이런 수사는 현재의 인문교육의 원형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아놀드의 태도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던 정치적 소요를 무리하게 탄압함으로써 일을 그르치고 만 당시의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기보다, 혼란에 두려움을 느끼고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우중”(Populace)을 순치하기 위해 ‘교양’, ‘문화’의 이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테리 이글튼(Terry Eagleton)은 아놀드의 교양에서 “부르조아 계급 영역 밖에 존재하는 조직적 세력을 분쇄하고 다시 통합하려는 동기”를 찾는다. 그렇다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순은 최근 한국 사회가 유례없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빈곤에 의한 노인 자살율 세계 1위, 젊은 여성의 집단파업 형식으로서의 출산율 저하 세계 1위, 악화되는 계층별 소득곡선에 대한 사회적 위기 등, 우리 사회는 극한적으로 분열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인문학은 이 분열이 야기하는 무의식적 두려움에 맞선 임시적 방편은 아닌가?

인문학 담론 유행의 마지막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인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부국강병의 담론이다. 원래 우리나라 대학은 유럽의 대학처럼 자치적 조직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교육부의 명령에 따라, 국가를 선진화시키는 공적 기구의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학교 설립의 취지에는 처음부터 국가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제공해야 할 목적이 암암리에 전제로 깔리곤 했었다. 그런데, 조셉 나이(Joseph Nye Jr.)의 용어를 빌면, 과거에는 법률, 경제, 공학이 중시되었다면 이제는 ‘소프트 파워’를 함양하기 위해서, 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al Wallerstein)의 용어를 빌어서 말하면 한국의 위상이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변함에 따라, 인문학적 유연성과 창조성이 새롭게 강조되어야 할 국면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계체제 내에서 주변부 또는 반주변부에 처했던 한국의 위상이 정치, 경제만 아니라 대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 국가주도 수출 주도형 경제의 동력이 선진경제의 주문생산이었듯, 학문연구 분야도 중심부로부터 하청을 받는 구조였다. 연구의 주제, 방향, 목적은 중심부에서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완제품의 일부를 하청 받는 구조일 때 시급한 것은 전체적 통찰을 함양하는 인문교육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과 전공 지식이었다. 그런데, 20세기 끝물에서부터 한국이 반주변부로 이전하는 한편 선진 제품을 모방하기도 쉽지 않은 경제 질서의 국면 변화가 겹치게 되는데, 최근 우리 기업 중 가장 잘 나가는 삼성이 인문학적 소양과 창조성을 강조하게 된 배경으로 이런 변화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의 ‘부활’을 보면서 나 자신을 비롯하여 정작 인문학자들은 지극히 착잡할 따름이다. 인문학적 가치가 재조명 받는 현상을 타기할 이유야 없지만, 정작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즉 대학에서 인문학이나 교양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최고 CEO 자리에 오른 경영의 귀재들이 인문학의 상업적 효용가치를 들고 나오는 역설이 불편한 것이다. 이 불편함은 작금의 인문학 열풍이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본의를 지극히 왜곡하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인문학, 그리고 인문학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교양교육의 고전적 이념은 “온전한 인간”(the whole person)을 양성하는 것이고, 이때 온전한 인간이란 크게 봐서 폭넓은 시야, 통합적 구성력, 창조적 상상력, 튼실한 판단력의 자질을 의미하며, 우리 모두는 이런 자질을 갖출 때 비로소 개인적으로는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책임감을 가지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이 된다고 말해왔다. 이처럼 교양 개념에는 세속적 삶의 핵심인 정치과정에 세속적, 파편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원숙한 관점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내장되어 있는데 반해,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교양적 측면을 간과하고 세속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통합적 구성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실속도 없이 인문학의 신자유주의 경영학의 자기도취에 장단을 맞출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동안 인문학은 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위기의 대상이 어떻게 갑자기 구원의 주체로 전화할 수 있는가? 인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의 주체인가?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는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Humanity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인문학자들의 담론 속에서 인문학은 늘상 위기로 표현되었으며, 그럼에도 인문학은 계속 유지되고 있으니 정말로 위기인지 아니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a crying wolf”)인지 물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커트 스펠마이어(Kurt Spellmeyer)는 싸이드보다 훨씬 냉소적하다. 그는 인문학이 지금과 같은 외양을 갖춘 지는 백년이 채 되지 않는데, 인문학 관련 학과는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재임시절 잠깐 영화를 누렸지만 그후 사회적 영향력의 계속된 감소로 말미암아 지금 상태로는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지금의 인문학이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만, 위기의 실감과 정도가 상당히 다른데다 무엇보다 위기의 원인과 처방에 들어가면 의견이 완전히 갈린다.

싸이드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국제적 위상강화와 동서대결로 인한 문화적 긴장으로 인하여 전통적 인문학 속으로 국가주의가 깊이 침투했으며, 냉전 종식 이후에도 매쓔 아놀드(Matthew Arnold) 식의 전통적 인식론은 탈구조주의 이론의 부상으로 인해 약화되지만 유럽중심주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가 제시하는 인문학의 출구는 한편으로는 정전목록을 비서구적 문화생산물에 대폭 개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밖에서 목하 진행되는 야만적 행위에 인문학이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즉, 현재의 인문학이 유럽중심주의와 탈구조주의적 문제틀에 볼모로 잡힌 면이 있지만, “해방과 계몽에 바친 인간적 노동과 에너지의 산물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집단적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인간의 오독과 오해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판적 실천”의 학문으로 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스펠마이어는 현재의 인문학을 만들어낸 지난 백 년간의 인문학 역사 자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의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서 인문학은 스스로를 점차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전문가의 학문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스펠마이어의 불신에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은데, 그럼에도 여기서 굳이 인용하는 까닭은 그가 인문학 실패의 원인을 시장과 신자유주의에게 돌리는 익숙한 항변에 반박하면서 귀책사유를 인문학의 역사 내부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스펠마이어의 구도에 따르면, 위기는 20세기 초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의 성장방식을 따라 자신들의 연구를 대중의 일상영역과 단절시키면서 탈사회화된 전문가집단으로 성장한 결과 초래한다. 탈사회화의 대표적 사례로 그가 제시하는 예는 60년대 이후 미국 인문학계 전반에 격변을 몰고 온 ‘이론’의 부상이다. 이론이 중심이 된 인문학은 기술적 추상의 정도가 지나치게 높아져서 오로지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용어로 소통되는데, 이런 추상 수준은 실상은 경영학과 자연과학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인문학자들의 권위 회복 전략에 불과하다고 비꼬고 있다.

현재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여기서는 인문학에 대한 자리인 만큼 이론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실로 우회해 문제점을 말해 보자. 우선 이론의 난해성이 가진 문제이다. 흔히, 현장교육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이론을 소화해서 쉽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론’의 성실성을 신뢰한다면 현재의 이론 자체가 저자들이 가장 쉽게 쓴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역설에 빠진다. 요컨대, 왜곡하지 않고는 쉽게 전달하기 어렵다는 근원적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이론 중심의 인문학 교육이 현장에서 야기한 또다른 맹점은 놀라울 정도로 ‘종다양성’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인문학자들은 데리다, 라캉, 푸꼬, 지젝, 아감벤 등에 매몰되어, ‘집단지성’, ‘공진화’, ‘종다양성’과 같이 진화생물학, 인류학 등에서 제기된 다양한 이론들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체제의 작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개인적, 집단적 실천을 무력하게 만드는 점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인문학계를 뒤흔든 이론, 특히 탈구조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수년 전 국내에서 출판된 『싸우는 인문학』의 기고자

상당수도 인문학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예를 들면, 진태원은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등 현대의 좌파 이론가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려 하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개조하려는 노력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개인적 실천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체제의 작동에 초점을 맞춘 이론의 융성은 “희망의 현실화”보다 “절망의 합리화”에 가깝다. 실제로, 이론을 배우게 되면 모든 글이나 실천에 내재하는 약점이나 난제(aporia)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인식하지만, 정작 생산적 대안을 제시하는 길을 막기 일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 사업가보다 남의 허점을 잡아내는 수사관으로 키우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글이나 실천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규칙위반자의 범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이론을 배우게 될 때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수사관이라는 범주에 갇히게 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론으로는 늘 혁명을 찬양하지만 결코

이를 실행하지는 않는데, 그러므로 이산(diaspora)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면서도 정작 이민자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자. 시장은 암흑인데, 인문학은 광명이라는 식의 담론, 혹은 인문학이 시장의 광명이 되리라는 식의 담론이 2014년 한국사회에서 요동치고 있는데, 정작 주류 인문학은 가라앉은 한국 사회에서 희망을 만들 능력이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인문교육의 성취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점을 들라면 인문학의 이념으로 흔히 지목하는 ‘온전한 인간’(the whole person)에 대한 믿음 상실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인문학, 그리고 인문학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교양교육의 고전적 이념은 “온전한 인간”(the whole person)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온전한 인간이란 개념에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 세속적 정치과정에 세속적, 사심없고 초월적인 관점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내장되어 있었다.

문제는 초월적 판관의 양식과 판단력을 갖추려는 인문학적 이념은 현대에 올수록 사라진다는 점이다. 미국의 문화연구자 재니스 래드웨이(Janice Radway)는 고급독자도 대중독자도 아닌 중급 수준의 내용을 담은 “이 달의 책”(The Book of the Month)에 대한 연구에서 20세기 초입을 문화적 가치의 실용성에 대한 신뢰가 일반화된 시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초월적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독서의 이념이 1920년대쯤 되면 지상으로 내려와 목적지향적 독서가 탄생하는데, 래드웨이는 그 원인으로 20세기초 미국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주목한다. 미국이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직업형식과 계급의 재편이 일어나는데, 이때 전문관리직 계층에게 일종의 문화—즉, 교양—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 1909년 콜리어출판사(P.F.Collier & Son)는 ‘하버드 고전씨리즈“(“Harvard Classics”)를 창간하였는데,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Charles W. Eliot)의 추천사가 붙었고, 이 전집은 크게 두 가지 실용적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교양인의 이미지이고, 두 번째는 고수익의 가능성이었다. 교양의 이념 속에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이미 들어와 있다.

저간의 사정은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원일의 단편 ｢깨끗한 몸｣의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자. 명절에만 목욕을 가던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이다. 동란의 와중에도 설날은 다가오고, 당시의 관습대로 어머니는 국민학교 고학년 남자아이인 화자를 여탕으로 데리고 가서 박박 몸을 문지른다. 주위 눈치를 아랑곳 하지 않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에게 몸을 맡긴, 머리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한 화자가 느끼는 수치심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풀이 죽은 아이의 모습에서 마침내 어머니도 그걸 인지한다.



“더러운 세월을 만나 애비 없는 설움으로 니가 비록 남으 집에 얹혀 얻어묵고 있지마는 씻은 몸처럼 마음도 깨끗해야 하니라. 깨끗한 마음으로......길남아, 뒷날 우리 식구가 이 고생하고 살았을 때를 웃으며 이야기할라 카모 니가 우째하며 살아야 되는 줄을 알고 있제?”

나는 대답도 않고 묵묵히 걸었다. 나는 어머니가 할 다음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말씀에 보답할 자신감이 없었으므로 푹 꺾은 고개가 들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겨드랑이에서 돋아나던 빳빳한 날개가 갑자기 소금에 절인 푸새처럼 힘없이 축축 처져내림을 느꼈다.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우짜든동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밖에 없데이.”



배경은 1952년, 발표는 1987년이다. “공부”의 종착지로서의 “훌륭한 사람”에 대한 믿음은 80년대에 사라진다. 비록 성공의 암시가 강하게 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이란 수식에 들어있는 윤리적 기율과 수양에 기초한 원만한 인간이란 이념은 형해화되어 오로지 인문교육에서만 희미하게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주류 인문학은 무엇을 했던가? “훌륭한 사람”의 이념이 지배계급과 자본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지금까지 온 힘을 기울인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미래의 인문학, 그리고 미래의 인문학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여기서 진리와 진실이 하나로 묶이는 인문학 교육, 즉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 “좋은 삶에 대해 토론하는 교육”을 제창하려 한다. 예를 들자. 몇 년 전 번역 출간된 아만다 리플리(Amanda Ripley)의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The Smartest Kids in the World)는 OECD 주관의 PISA 평가에 근거하여 미국, 핀란드, 폴란드, 한국 네 나라의 교육제도를 취재한 저널리즘 보고서이다. 우리가 해마다 3만 명씩 ‘교육선진국’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는데, PISA의 평가에 의하면, 미국은 1인당 교육비 투자 세계 1위이고, 하드웨어 부문도 가장 우수하지만, 애석하게도 PISA 성적만은 전체 OECD 국가 가운데 중간 이하이고, 수학 성적은 특히 심각하다. 리플리는 미국 교육의 역설을 풀기 위해, 그리고 우수한 교육을 만드는 원인을 찾기 위해 PISA 우등생인 핀란드, 한국, 폴란드를 찾아 나섰다.

한국이 PISA 평가 우등생이니 미국의 교육현실을 찾는 과정에 한국이 끼어든 것도 흥미롭지만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이 책에는 한국 교육현실의 실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데(예를 들면, 수업 중에 학생의 1/3이 잠을 자고, 일부는 팔에 베개를 끼고 본격 렘 수면을 취하는 교실현장이나 대치동 학원가의 실태 등 사실 추적은 상당히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는 바도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PISA 성적도 낮은 미국에 왜 한국의 학부모들이 기를 쓰고 학생을 보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한국 학생의 높은 PISA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비정한 교육현실을 압력밥솥식 교육이라고, 좁은 밀실의 공간에서 티셔츠 대신 지식을 대량생산하는 포스트모던한 노동착취의 현장이라고 가차 없이 비판한다.

아마 그 답은 아만다 리플리 자신이 모르는 미국 교육의 잠재성에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끝까지 뇌리에 남는 것은 킴이라는 핀란드로 교환학생으로 간 오클라호마 출신 여학생이었다. 9/11 때 미 국방부는 쥐의 머리에 전극을 꽂아 행동을 유도하는 실험을 발표했다. 폭발물 탐지용 쥐였다. 9.11이 벌어진 직후였고 처음으로 국토안전부 장관이 임명된 때였는데, 그때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뉴스에서는 쥐의 뇌에 전극을 꽂아 쥐의 진로 방향을 조절해 인간이 가지 못하는 곳에 쥐를 보내 원격조정이 가능한 폭발물 감지장치로 이용한다고 보도했다.

킴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쥐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생명이 쥐의 생명보다 조금 더 가치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다른 생물의 뇌를 침해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고 부도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킴에게 진리와 진실은 하나였다. 그녀는 부시 대통령에게 항의편지를 쓰고, 지나가는 친구들에게 쥐 실험에 대해 설명하고 서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와 진실을 결합하려는 그 시도는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그녀는 보수적 오클라호마의 삶에서 좌절당하고 핀란드 교환학생으로 가는 것으로 자신의 대안적 삶을 찾아보려 했다. 물론, 미국의 본격 과학계 사람들에게는 ‘순진한’ 이야기로 배척당하겠지만, 적어도 미국의 민중들의 교육관 속에는 아직 이렇게 진리와 진실을 하나로 묶으려는 생각의 뿌리가 남아있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삐에르 아도(Pierre Hadot)는 서양 고전철학에 대해 연구서에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플라톤에게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생활양식”이었으며, 특정한 철학의 선택은 일종의 “영성훈련”이었다. 따라서 철학은 “생활공동체,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 등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원래 철학에의 입문은 특정한 세계관으로 구성된 삶의 공동체에 입문하여 배운다는 결단의 의미를 말하는 것인데, 중세에 오면 철학의 중핵은 특정한 삶을 위한 수양에서 논증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도의 주장을 반영하여, 인문학 교육을, 넓게 보면 학교교육 자체를 특정한 삶의 형식, 특정한 세계관의 부활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특정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특정한 삶의 형식과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이며, 교육은 그러한 삶의 형식을 몸에 붙이는 수양의 과정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인가? 이런 포부를 실현시킬 수 있는 첫 걸음으로 몇 가지 대안을 제기하고, 그 예를 하나 드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자.

첫째, 학교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작으면서 성격이 훨씬 뚜렷해야 할 것이며, 각 학교는 특유의 비전. 특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보편적 교육에 더해서 특유의 비전을 구체화시키는 교육과정을 설계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비전은 수양, 시민, 녹색, 세계화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중고등학교부터 기능적 다양성과 함께 철학적 다양성을 가진 학교가 나와야 한다.

둘째로, 인문학을 따로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과목을 인문화해야 할 것이다. 쥐의 뇌에 전극을 넣는 것을 당연시하는 대신, 그것이 정말 우리--쥐는 말할 것도 없지만--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 묻는 교육이 과학 내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삶 자체는 비인문적 구조의 기반에 얹혀있는데도, 인문학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파멸을 면해보려는 기술주의적 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즉, 진리와 진실이 함께 가는 교육이어야 한다.

셋째, 모든 인문학 과목은 사회적 의제와 연결된 교육을 해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인문주의 자체보다, “비판적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를 강조했다. 인문학이란 구체적 의제에 대해 우리에게 거의 무의식 수준에서 주어진 상식적 전제들을 다시 생각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대안까지 논의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작금의 현실에서 이론에의 심취는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상하는 자폐적 증상은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이 시점에서 최근 읽은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How Much Is Enough?)를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서 이 저작을 논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런 식의 저작이 탈구조주의가 절정에 오른 현재의 인문학 풍토에서 좀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고, 두 번째는 이 저작은 “온전한 인간” 또는 “좋은 삶”의 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적 의제에 대한 인문학적 해결책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작은 경제학자인 아버지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와 철학자인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Edward Skidelsky)의 공동저자인데, 윤리학과 경제학을 하나로 묶어 ‘좋은 삶’의 이념 아래 소득과 성장의 가치를 심문하는 이 저작은 경제공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두로 기록되는 1930년대 벽두에 케인즈가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을 논한 소품 에세로부터 시작한다. 논문에서 케인즈는 100년 후인 2030년이 되면, 생활수준은 4-8배 상승하고 노동시간은 하루 3시간으로 단축되면서, “예술가적인 자발적이고 즐거운 삶”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예견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유토피아적 꿈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담은 것인데,

현재 국면에서 보면 케인즈의 예견 가운데 생산성 부분의 예측만 타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에 반해 노동시간 감축은 불과 15%이고, 무엇보다 ‘좋은 삶’ 개념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가 되었다.

케인즈의 예측이 틀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들의 판단은 케인즈의 오류는 욕구(wants)와 필요(needs)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케인즈는 인간의 욕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물적 ‘충족“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여가를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주체를 부정하고 욕망은 만들어진 것으로 규정하는 현재의 이론과 달리 저자들은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욕구의 무한성’과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구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이다. 첫 번째 문제는 근대 이전 거의 모든 문명에서 고민했던 문제인데, 결국 좋은 삶을 위해서는 ‘욕구’ 자체를 제한하거나 순치해야 한다는 태도로 귀결된다. 자본주의 도래 이전의 세계에서 재산은 단지 좋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노동은 그 조건을 현실화시키는 고단한 활동이었다. 당시에는 재산의 무한축적을 지시하는 개념은 ‘탐욕’이었고 탐욕은 그 자체로 죄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욕구의 일탈을 막으려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저자들이 괴테를 빌어서 ‘파우스트적 협상’이라 명명한 근대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탐욕을 악덕으로 간주한 통찰을 잊어버렸다. 탐욕에서 죄악의 의미를 벗겨 중립적 개념으로 순화시킨 작업을 수행한 주체는 다름 아닌 아담 스미스 이후의 근대경제학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탐욕’이란 용어를 ‘이기심’(=사익)이란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예전에는 악덕이었던 무한정의 축재를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로 변모시켰고, 한발 더 나아가서 개개인이 사익(self-interest)을 추구할 때 오히려 우리 사회는 물질적 궁핍으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후 정통경제학은 이 우아한 전략의 목록에 ‘효용’과 ‘선택’ 등의 개념을 추가한다.

그런데, ‘파우스트적 타협’이란 사악한 동기도 전체 사회를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근대적 자신감에 기초한 것인데, 정작 타협을 만들어 낸 스미스 자신은 자기 이론이 ‘악마’와의 타협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미스에게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윤리적 관심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주류 경제학은 물론 우리의 일반적 영역에서조차 완전히 밀려나게 되며, “그 결과” 우리는 좋은 삶이란 개념을 잊어버리고 목적도 방향도 없이 오직 성장만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대의 파우스트적 기획은 의도와 달리 우리가

보듯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파우스트적 타협과 실패에 대한 논의의 다음 순서는 당연히 ‘재산’과 ‘욕구’에 대한 근대 이전 시기 철학자들의 논의로 이어진다. 이때 저자들 논의의 중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활동은 궁극(telos)을 지향하는데, 종착점은 다름 아닌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이란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욕구의 올바른 방향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그중 최선의 삶의 형태는 ‘여가’이다. 저자는 고전철학 전통에 의거하여 좋은 삶을 구성하는 필수조건들을 기본재로 명명하고, 대부분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 초역사적 공약수’를 찾아 나서는데 그 결과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7개로 귀착된다. 마지막으로 기본재를 현실에서 구현할 구체적 방도를 찾아나서는 마지막 장에서는 크게 노동시간 단축과 소비활동 규제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여러 가지 정책방향을 제시한다.

이 저작은 ‘좋은 삶’의 개념을 되살리려는 저자의 의도, 이를 경제학과 철학의 양면에서 논증하려는 노력, 관용과 중립의 차이에 기반한 자유주의 철학 비판 등 흥미 있는 대목이 적지 않지만, 문제점 역시 적지 않아 보인다. 우선, 심층 생태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들은 환경적 재앙은 예측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면서, 환경론자들 자신은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낭만적 신념을 표출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예측이 쉽지 않더라도 현재적 상황에서 가장 개연성이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지, 의도는 훌륭하지만 낭만주의적 세계관이라는 진짜 의도는 감추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비판의 정도가 아니다.

저자들에게 보이는 ‘일국주의적’ 사고도 문제적이다. 예를 들면, 저자들은 자신들 이론이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조건이 충족된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며, 저작의 말미에서 “세계의 최빈국들이 우리가 이미 달성한 충분함의 수준까지 따라올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세계체제론으로 일국주의 사고를 넘어선 때가 언젠데 아직도 영국의 풍요와 빈국의 가난을 분리시켜 생각한단 말인가? 저자들은 선진국 발전이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 못지않게 후진국 자원을 헐값에 이용한 사실, 또한 선진국의 단기적 이익을 위한 저렴한 자원착취가 제3세계의 막대한 부채와 환경파괴를 유발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저자들의 일국주의적 순진성은 전후 영국경제의 현실과 발전과정에 대한 분석과정에서도 일정한 오류를 낳는다. 예를 들면, 저자들은 20세기에 복지국가 수립이 가능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좋은 삶’의 이념이 편린으로나마 남아있었던 여러 사상들—카톨릭의 가르침, 뉴 리버럴리즘, 사회민주주의. 후생경제학 등—의 결합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좋은 삶’에 대한 언어 상실, 즉 개념 상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0년대의 위기는 일반적으로 완전고용정책을 중시하는 케인즈 경제학에 기반한 전후자본주의의 성장의 한계, 중동의 석유위기, 미국의 경제적 후퇴 등으로 설명한다. 70년대 이후의 난국의 주된 원인을 언어상실로만 규정하기 힘든 것이,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보여준 ‘문화와 사회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좋은 삶’을 상상하려는 인문학적 노력이 저자들 주장처럼 근대에 실종되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런데,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은 인문저서로서, 그리고 교양도서로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는데, 흥미있는 점은 이 장점이 현재 학계의 대세인 ‘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용서하기 힘든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탈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저작에서 보이는 ‘경험주의적’ 사고의 흔적과 ‘본질주의적’ 오류이다. 예를 들면, 저자들은 좋은 삶의 개념은 근대 이전 그리스, 중국, 인도 등의 문명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몇 가지 예로 든 다음, 이 개념은 타 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 만큼 ‘보편적 개념’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 문제에 들어가면 개인 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문명 간 차이도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대담하게 주장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좋은 삶’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다양한 삶은 서로 비교가능하고, 따라서 이 좋은 삶을 구성하는 ‘공통요소’들을 약분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만 요약해도 이론전공자들은 이 저작에서 어렵지 않게 경험적, 본질적 혐의를 잡아낼 수 있을 터인데, 이 때문에 이 저작은 탈구조주의가 팽배한 인문학계의 풍토에서는 논문으로는 출판조차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결론 부분에서 좋은 삶의 개념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구성된 환상이 될 수 없으며, 동시에 개인의 주관적 성향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저자들은 7 가지를 ‘보편적, 초역사적 공약수’로 제시한다. 문제는 이 대목이 이 저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동시에 ‘좋은 삶’의 이념, 그리고 이에 기초한 정책방향을 과감하게 현실화시켰기에 가장 치열한 토론을 야기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정치경제학적 ‘실천’을 위한 구체적 출발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수사관의 입지에서 벗어나 사회를 판단하고 혁신할 실천적 행동의 장으로 초대한다는 점이다. 현재 이론의 대세는 자유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보충적 개념으로 폄하하거나, 자유민주주의와 비윤리적 정치행위와 손을 잡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은 폭력과 검열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지지하고 있다는 이율배반에 처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근본적 비판을 할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 수 있을지 한참 헷갈리게 된다. 스키델스키의 논의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문학과 교양이 지향하는 바가 각자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는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책임감을 가지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라면 이 저작은 그 어느 저작보다도 그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7 가지 기본재의 타당성을 따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실을 볼 때, 저자가 틀릴 때조차 중요한 통찰을 가져다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이 현재의 이론적 풍토에서는 학문적으로는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현 단계 우리의 인문교육이 처한 상황과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저작이기도 하다.